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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놀이

 

                                                

                                                                                                                                                                                                                                                 이선영(미술평론가)

 

 

장난감처럼 세트화 된 실내 정경과 그 정경 너머로 보이는 또 다른 세계가 동시에 포착된 정상현의 작품은 서로 구별되는 질서를 가진 두 세계의 관계로 긴장감이 도는 장이다. 비디오 설치작품 '양재동 풍경'은 손때묻은 벽지를 배경으로 구석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물건 꾸러미가 있는 방 가운데에 사다리가 걸쳐있는 정원모델이 있고, 저 밖으로는 차가 쌩쌩 달리는 실외의 풍경이 함께 있는 작품이다. 이번 전시는 진짜 실내인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의 실내와는 달리, 그것이 축소 모델이라는 사실을 좀더 강조하는 듯하다. 전시장에 걸린 확대된 디지털 사진도 마찬가지이다. 가령 어린이 놀이터와 장난감이 매치된 사진이나, 놓여진 사물들 간의 크기 차이가 전혀 조정되지 않은 작업실의 풍경 등이 그러하다.

 

그의 작품은 인화된 사진이든 비디오설치이든 틀 속의 틀이라는 이중 장치를 통해 자족적인 소우주로서의 축소모델과 그 너머의 세계를 보여준다. 물론 시각적인 강조점은 전면에 배치된 축소모델의 세계이지만, 비디오 설치작품에서 더불어 나오는 사운드는 광경 저 너머로 움직이는 현실세계의 압도적인 힘을 동시에 부여한다. 비디오 설치 작품 '양재동 풍경'에서 전시장 구석구석에 설치한 여러 대의 스피커는 모델 저 너머로 보이는 현실세계의 연출을 위해 작가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려준다. 스테레오 사운드로 굉음을 내며 갑자기 나타났다 사라지는 도로 위의 차들은 전면에 조용히 서 있는 축소모델 내지는 상징적 우주, 또는 내면풍경이라 할만한 것을 위협하는 요소이다.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를 무시하고 평행선을 달리는 두 세계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든 그렇다 하더라도 이러한 평행선은 서로에게 위협적이다. 세트로 대변되는 자족적인 소우주와 그것을 단번에 깔아뭉갤 것 같은 위협적인 현실 세계의 대조를 통해, 그는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낸다. 자신이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음으로 인해 자율성과 자유의 느낌을 가질수 있는 소우주의 세계와 통제 불능의 힘으로 압도하는 현실의 세계 사이의 대조는 예술과 삶의 긴장이란 항목으로 대치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장난감같이 연출된 실내의 정경은 예술의 놀이적 측면을 강조한다.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나 호모 파베르이기 보다는 호모 루덴스라는 가설이 호이징가에 의해 주장된 바 있다. 여기에서 놀이는 문화의 한 구성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호이징가에 의하면 놀이는 하나의 의미기능이다. 놀이 속에는 생활의 직접적인 요구를 초월하고 동시에 생활에 의미를 부여하는 놀고 있는 어떤 것이 있다. 의미 있는 형식으로서의 놀이는 이미지의 조작, 즉 현실을 이미지로 전환시키는 형상화 작용인 상상력에 근거한다. 정상현이 연출하는 놀이의 세계도 질서를 창조하며, 불완전한 세계와 혼돈 된 삶 속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완벽성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후경에 예측할 수 없는 질서가 지배하는 현실세계와 달리 질서화 된 놀이의 세계이다.

 

로제 카유와는 [놀이와 인간]에서 놀이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자유로운 활동, 분리된 활동, 확정되어 있지 않은 활동, 비생산적인 활동, 규칙이 있는 활동, 허구적인 활동. 그가 서술한 놀이의 특징은 예술과도 상당부분 중첩된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카유와가 놀이가 제공하는 모델의 기능을 서술할 때이다. 그는 놀이가 자연의 무질서한 상태를 규칙이 따르는 세계로 바꿀 필요가 있는 한 놀이가 제공하는 모델은 그러한 세계를 앞질러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놀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인간은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 또 질서를 만들어 내고 구성(유기적 연계)을 생각해 내며 공정성을 확립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정상현의 작품에서 질서화된 전경의 놀이의 세계는 후경에서 뜬금없이 진행되는 폭력적인 현실과는 구별된다. 특히 작가는 전경의 모델에 픽션적 성격을 부여함으로서, 구속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생활에 영향력이 없는 활동으로서의 놀이(와 예술)의 세계를 강조한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양하게 세트화 된 실내전경은 놀이를 새로 시작 할 때마다 놀이하는 자는 제로 상태로 돌아가서 처음 시작할 때와 똑같은 조건에 놓임을 보여준다. 그것은 진정 현실과는 구별되는 게임의 미덕이라고 생각된다. 반면 기계성과 우연성, 그리고 지루함과 가혹함이 병존하는 현실세계의 불규칙적인 게임 원칙은 작가라는 존재에게는 위협적일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게임원칙을 극복 할 수 있는 진정한 도전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작가를 지치게 하고 고갈시키며, 때로 자기만의 작은 해방구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위협적인 힘으로 다가올 수 있다. 로제 카유와에 의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놀이의 영역은 닫혀지고 보호받고 따로 잡아둔 세계, 즉 순수공간이다. 호이징가에게도 놀이의 장은 안정된 공간, 즉 일정한 규칙들이 지켜지고 있는 신성하고 한정된 분리된 영역을 말한다. 그것은 평소의 세계의 한 복판에 있는 일시적인 세계이며,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수행하기 위한 일시적인 세계인 것이다. 놀이는 이러한 자율성과 총체성으로 인해 예술의 세계와 유사한 것이 된다. 놀이는 분할할 수 없는 전체적인 현상이자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며, 현실의 유용한 수정을 꾀하지 않는 일체의 활동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율성, 또는 유폐가 왜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맹목적으로 핑핑 돌아가는 현실에 대해 약간 굼떠 보이는 예술의 존재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문명은 자연이라는 거친 세계를 관리된 세계로 이행시켰지만, 목적을 잃은 관리의 세계는 다시금 예측할 수 없는 정글의 법칙을 낳았다. 질서화 된 놀이의 세계를 맹목적 힘이 지배하는 무차별적인 현실세계와 대조하는 정상현의 작품은 보다 공정한 게임원칙을 촉구하는 균형 감각의 발로이자, 현실을 보다 일관성 있는 체계에 의거하여 배치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다. 카유와에 의하면 진보란 운의 조합에 기초를 둔 사회를 우연의 역할을 희생시키고 공정함의 역할을 증가시키려는 노력이다. 예술이 만들어내곤 하는 질서 있는 소우주는 이러한 진보의 노력과 함께 한다. 이러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는, 현대사회가 진정한 놀이를 사라지게 하고 있으며, 일정한 기준도 없고, 헌신해야할 원리도 없으며 창조적인 파격도 없는 세계, 요컨대 비인간적이고 비예술적인 세계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 2018 by JungSang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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